2009년 11월에 썼던 리뷰인데 오늘 이창동의 <소지>를 읽다가 <여행자>의 한 장면, 내가 가장 인상깊게 봤던 장면과 아주 비슷한 묘사가 있어 첨가할 것이 생겼다. 우니 르콩드가 감독한 <여행자>의 제작자는 이창동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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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가 '엄마찾아 삼만리 레퀴엠'이 아닌 건 알았지만,
고아원에 내던져진 9살짜리 아이가 모든 인생의 여정과 감정의 원형을 다 보여주니
정말 놀라운 영화였다.
영화를 보기 전 최근 내 생활은
할 일은 많지만, 어찌보면 치열하지만,
부딪힘이 없다는 의미에서 안온한 것이어서,
그저 인생은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이 세 마디로 사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여행자>를 보고나서,
그리고 최근 사회에 진출한 동생의 마음고생, 심적타격을 떠올리고 나서,
아, 역시....인생은...투쟁이었지, 라고 마음 속에 여러개의 각주를 다다다다 달게 된다.
내가 겪었던 안 좋은 기억들도 다다다다 떠오르면서.
배신과 배반과 실망과 좌절의 순간들,
기대를 거둬들이고 홀로 절차탁마했던 기억들,
트라우마들이 촤르르 펼쳐졌다.
왜 사람들은 약속을 안 지키는 걸까?"
영화는 고아원에 보내진 아홉 살 진희가 아버지와 헤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
또래에게 마음을 열고, 또 마음을 다치는 과정, 끊임없이 이별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잠시 여행을 가는 거라던 아빠는 자기를 생면부지의 공간에 홀로 떨어뜨려 놓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해주지도 않은 채,, 심지어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간다.
줄곧 칭찬받아왔을 총명함으로 주소를 들이대며 원장에게 아빠를 찾아가달라 요구! 하지만
이사를 갔다는 더 나쁜 소식만을 들을 뿐이다.
고아원은 잠시 머물다 가는 대기의 장소이다.
진희는 끊임없이 이별을 맞딱뜨린다.
그리고 그런 사건 하나하나가 세상을 흔드는 충격이다.
온 몸과 마음을 의지했던 아빠.
아무 데도 안 간다고 고집부리던 진희에게 같이 가자고 영어까지 알려주던 언니.
그들은 떠나간다.
처음 이별할 땐 절실한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았던 진희는
두 번째 이별 앞에선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이별 속에 인생이 있다.
아이에겐,
태초에 약속이 있었고
그 다음엔 믿음이 있었고
그러나 상실이 있었고
받아들이지 못해 몸부림치던 나날이 있었고
차라리 죽어 없어지려던 의지가 있었다.
진희가 결국 프랑스 땅을 밟고 눈을 크게 뜨는 건,
그만큼 인생을 살았고, 알았고, "살아가겠다"는 뜻이다.
거기까지 도달하기까지,
깨지고 부서진 마음의 파편으로
몇 개의 무덤을 만들었을 아이의
강건하고 경건한 의지의 표현이다.
이 영화는 상실과 애도를 넘어서
'삶의 형성'을 말하는 영화다.
삶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렇게 수없이 무덤을 만들며,
가슴 속의 홈을 메우며...
"당신은 모르실 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세월이 흘러가면은 그때서 뉘우칠 거야.
마음이 서글플 때나, 초라해 보일 때에는,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있을게요"
결국 진희가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왈칵 울고 말았다...
또 정말 시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프랑스인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혼자 비행기에 탄 진희가
꿈속에서 아버지를 본다. (상징적으로 이별하는 장면이다.)
진희는 어두운 밤 아버지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자전거를 타고 간다.
어둡고 긴 밤을 자전거 불빛 하나에 의지해,
아버지의 등에 의지해 가던 장면,,,
그들은, 그들이 내던 불빛은 긴 어둠의 저 너머로 서서히 사라진다.
그 장면은 마치 아기에게서 탯줄이 끊어질 때 아기들이 느끼는 아득한 상실의 순간,
첫번째 상실의 느낌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그런 느낌을 느낀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
어떻게 그런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을까...
너무 시적이어서 계속 생각이 난다.
여운이 긴 영화...
이창동 감독이 제작했고
아빠역으로 설경구, 의사역으로 문성근이 나온다.
제작은 거의 한국 자본, 스탭으로 이뤄진 것 같지만
(이창동+영화사 진진의 김난숙 대표를 중심으로)
프랑스 국립영화학교 시나리오 클래스에서 지원한 작품이라고 하니
아마 감독이 시나리오를 전공한 프랑스 국립영화학교 학생인 듯하다.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 우니 르콩트 감독의 아버지가 쓴 긴 장문의 편지가 공개된 적 있다.
9살 때 아이를 입양보낼 수밖에 없던 젊은 아버지의 절절한 사연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아버지가 기억하는 그렇게 작았던 아이가 이렇게 커서 한 세계를 만들어 냈다....
꼭 보세요.
영화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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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2009년에 쓴 리뷰였고,
오늘 읽은,
이창동이 1985년에 <실천문학>에 발표했던 단편 <소지>에 등장하는 장면을 옮겨본다. 이 환상이 나타난 순간의 아이러니, 앞뒤 정황을 다 빼고 .
"그녀는 남편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남편은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그녀는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남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남편이 보도연맹에 들어가고부터 그들은 처음으로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남편은 금융조합에 직장을 구했고, 출퇴근을 위해 자전거도 마련했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보았다. 한사코 타지 않으려는 그녀를 남편은 허리를 가볍게 안아 뒷자리에 태우고 방천둑으로 나갔던 것이다. 자전거가 둑을 달리기 시작할 때 그녀는 남편을 두 팔로 안았다. 남편의 허리통이 그렇게 든든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남편은 휘파람을 불었고, 수성천이 흘러가는 쪽으로 저녁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저녁노을이 눈 가득히 밀려와 있었다."
원형과 같은 이미지, 이 이미지는 이창동 감독에게 그런 이미지의 하나였던 것이리라. 어쩌면 우니 르콩트 감독도 비슷한 이미지를 자기 창고의 '원형 이미지'의 하나로 갖고 있었던 것일지도.
어찌됐든 재미있는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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