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5일 화요일

대화에 관하여

A는 오해에서라도 정의롭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되면 견디지 못하는 타입니다. 윤리적 감각이 발달한 사람.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의도치 않게 그런 사람들에게 시련이 닥치는 순간이 있다.

A의 상사가 누군가의 걱정을 한다.
프리랜서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다. 그는 한 일간지와 월간지에서 사진 기자로 일했었다. 그가 일자리가 없다고 전화를 했나보다. 전화를 끊은 상사는 넑두리를 한다. 아이고 이 아이가 어쩌구...

`윤리의 화신` A는 뒤를 돌아 오지랖을 발휘한다.
"모 영화잡지에서 사진 찍을 사람 뽑던데요"
"그러니까 얘가 나한테 지금 거기 청탁해 달라는 거 아니야. 거기 사장이 내 친구거든. 근데 난 누구 인사청탁 절대로 안 하거든!"

그 윤리의 화신 A는 머쓱해진다.
`그럼 내가 인사청탁 해주라는 소리 한 거냐. 나를 그렇게 볼 수 있냐.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억울하다.` 등.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번 일어날 법한 일인가. 비일비재하다.
대화의 방향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갈 때마다 정색하고
"저도 그런 거 싫어하는데요", 라든지,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닌데요. 그냥 어디에서 사람을 뽑더라, 한 거지, 제가 언제 인사청탁 하랬나요?" 이렇게 말하면 정말 판 깨는 거다.

대화의 흐름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이 세 사람이라고 하자.
대화는 일견 세 주체의 의견과 견해와 취향과 캐릭터가 충분히 구현되면서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절대 그렇지가 않다.
그 완급의 조절이며 타이밍이라는 게
대화마다 나름의 논리가 있고 동인이 있다.
마치 생명체 같은 것이어서 아무리 강한 캐릭터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대화의 생명체성을 인정하는 최소한의 동의를 바탕으로 대화를 한다면
"그래서요?" "정말요?" "그렇네요" 등의 추임새를 이따끔 채우며 하나의 유기체를 완성해 간다. 그때 그 세 사람은 조화롭고 아릅답다. 겉보기에.

윤리의 화신 A 같은 경우도 그렇게 '사회화'되었기 때문에 조금 많이 억울해도 "아니요, 전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닌데요"라고 항변하지 않는다. 대화에는 대화에 참여하는 각 주체의 희생과 숨고르기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성취되는 매끄러운 대화는 참여자들의 순간순간의 자기희생을 전제로 얻어지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모습과 권력이 기울어지는 방향 따위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대화의 유기체성'을 아예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면 이들이 끼면 물 흐르듯 흘러가는 대화가 성사되지 않는다.

"나는 영국에 여행간 적이 있는데"라고 누군가 여행담을 시작했다고 하자.
그럴 때 '대화불가능자'는 끼어든다.
"어, 나도 영국 간 적 있는데 난 거기서 빨간 우체통이 참 맘에 들었어."
여행담을 처음 시작하려 했던 사람은 갑작스러운 끼어듦에 조금은 놀랐지만 부드럽게 미소짓고 다시 말을 이어보려 한다.
"거기 40년이나 이어져 오던 홍차 가게가 있었는데."
"어, 나 홍차 되게 좋아하는데. 나는 녹차보다 홍차가 좋은 것 같아"라고 아까 그 사람은 다시 '자기 얘기'만 한다.

이런 난관을 뚫고 본인의 여행담을 이어간다면 대화는 어찌어찌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원래 말을 꺼내려던 사람은 입을 다물어버리고 만다. 하나의 대화는 성립하지 않는다. 사산된 하나의 유기체. 대화라는 것이 일상적이고 빈번하고 쉬운 일 같지만 여러 주체의 희생과 인내가 함께해야 성립하는 것이다.

2008.12.1.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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