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30일 토요일

[두 개의 문] 다큐에서 스릴러 장르의 차용과 윤리적 재현의 문제

1. 영화를 둘러싼 담론들

<두 개의 문>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누군가는 현장성(현장에 이들의 카메라가 없었다는 점)에 대해 말하고, 김소영 교수는 카메라의 현장성을 중시하는 입장의 반대편에서 트랜스미디어적(여러 매체를 인용,삽입,재구성) 성취에 대해 말했다(씨네21). 김동원 감독은 '매끈한 만듦새' '대중성' '더 나아가지 못함(급진적이지 못함)' 을 지적했다. 홍형숙 감독은 '매끈한 만듦새'가 관객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고도 의미있는 시도라고 평가했다(씨네21). 이동연 영상원 교수는 김소영 교수가 한국다큐멘터리가 <두 개의 문>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 평했다고 전했다.(프레시안)

이 영화에 대해 비판적인 쪽이든 지지하는 쪽이든 공히 <두 개의 문>이 더 많이 사람들에게 보여지길 바랄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진행형으로 수많은 '용산'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 사회에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계란'보다, '화염병'보다 큰 어떤 것을 던질 수 있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용산참사라는 소재를 다룬 이 영화가 많이 보여져야 한다는 '당위'의 언설은 의무감이나 윤리적 부채의식을 자극하기 때문에, 관계자들은 홍보를 하면서도 묘한 저항감 같은 것을 느낄 것이라고 짐작한다. 잠재적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만들었고, 영화적으로 좋은 영화이니 봐주세요. 가 아니라, 이런 소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으니 봐주세요, 라고 말할 때 가려지는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마 감독들도 그럴 것이다. 나도 최근에 위안부 피해 여성(이제는 할머니들)들을 위한 여성 뮤지션들의 컴필레이션 앨범 작업을 살짝 도왔는데, 홍보를 하면서 이들의 음악이 얼마나 좋은 줄 아세요, 그러니 공연에 오세요, 라는 말을 하기보다 이 일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를 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게 더 효과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지만 한켠에는 '대의'에 대한 강조, 의무감이 더 먼저 말해야 하는 것이라는 위계가 있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음반이 팔리는 건 이들이 작업한 신곡이 음악적으로 얼마나 좋은지에 달려있는 것이다. 영화도..뭐 그런 것이다. (음악들 좋음. 보장하니까 앨범 나오면 들어주세요. 특히 복수에 대한 신나는 노래가 있는데..좋아합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데 이 지점을 언급하고 싶어한 듯 보이는 한 평론가는 실망스럽게도 두 개의 지면에서 기존 독립다큐영화들을 깔아뭉개면서 <두 개의 문>을 추켜세우는 글을 쓰고 말았다. "어떤 소재를 다루었다는 이유만으로 만듦새에 관한 평가는 유보되고 관객이든 언론이든 평단이든 그 다큐에 대해 발언하는 것으로 시대와 사회에 동참하고 있다 자족하는 판타지가 존재한다"면서 기존 독립다큐를 '만듦새가 형편 없는데 소재 땜에 봐준 것'이라고 평가절하하고, <두 개의 문>은 비전에 맞춰 정확히 설계됐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근거가 없다. 이 영화의 비전이 무엇이었고, 어떤 방식으로 설계되었는지 영화를 해체하고 분석하기보다 선언적으로 좋다고 말한다. 희생량을 만드는 것도 구체적 체험과 개별 작품에 대한 분석이 아닌 선언적 방식이다. 내용 없을 뿐만 아니라 비겁한 글이다. 한 영화가 좋다고 말하기 위해 글의 대부분을 할애해 기존 영화를 뭉뚱그려 폄훼할 필요는 없다. 평론가에게 중요한 것은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저널리스트적 선언이 아니라, 텍스트를 영화적으로 살펴보고 해석의 외연을 확대하는 것이다. 

수많은 평가들을 보고 갔지만, 내가 본 <두 개의 문>은 어떤 평가와도 달랐다. 심지어 제일 많이 나온 단어, '차갑다'는 평가와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말을 하고 싶었다. 이 글은 내가 느낀 감상평이다.


2. 장르, 관객을 소구하는 재현의 방법론 

이 다큐 영화는 스릴러 장르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바로 이 점이 기존의 한국 다큐영화들과 변별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음악과 편집은 흡사 전쟁영화적 '쾌감'을 의도한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 2009년 1월에 일어난 '용산참사'는 우리 모두가 알고있는 공포스러운 폭력과 죽음의 기억이고, 실제로 경찰의 채증화면, 컬러TV 등의 현장 화면들은 똑같이 '전쟁영화'처럼 찍혀있다. 감독들은 이 재료들의 스타일을 영화적 형식으로 확장해서 밀고나간 것이었다. 그 스타일은 '버스 안 재연'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음악도 마찬가지로 그 장면에서 더욱 고조된다. 
  
나는 이 영화의 스릴러적 스타일이 애롤 모리스의 <씬 블루 라인>이나 <맨 온 와이어> 같은 영화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88년 영화인 <씬 블루 라인>은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살인사건 발생 11년 후, 사형선고를 받은 범인이 사실은 진범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다. 두 영화는 공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결정적 순간의 긴장감을 '재연'이라는 형식을 통해 살려낸다. 그리고 그 순간에 대한 재연은 다각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보여진다. <두 개의 문>의 야심은 법정에서 가해자로 판명난 철거민들(세입자들)이 국가폭력의 피해자이고 희생자임을 공판기록과 경찰의 육성, 진술서 등을 통해 증명하려는 것이기에 더욱 더 애롤 모리스의 <씬 블루 라인>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데 여기서 채택된 스릴러라는 장르가 과연 이 영화의 윤리적 동기와 위화감 없이 맞물리는가, 전쟁영화적 음향과 편집의 '쾌감'이 과연 주제의식을 뒷받침하는 형식인가, 이 점에 대해 의문이 든다. 스릴은 통제된 시선에서 발생한다. 희생자가 보고 있지 못한 어떤 지점에서 가해자, 시선의 권력을 가진 자가 다가온다.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관객은 조여오는 그림자, 겨눠지는 총, 희생자를 향해 압박해 들어오는 모든 행동에서 긴장감을 느낀다. 여기서 시선 안에 들어오는 정보는 파편적이다. 대상은 클로즈업 되어있다. 흔들리는 버스 안의 경찰특공대의 눈, 발, 옷깃, 그리고 이정표들이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혔다 말았다. 줌인 아웃, 포커스 인 아웃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터뷰를 제외하고 가장 잘 통제할 수 있는 연출 장면들이기에 카메라 워킹은 마음 먹은 듯 스릴을 강조한다.   

나는 김동원 감독이 언급한 '너무 만듦새에 신경쓴 것 아니냐'는 지적을 대중성을 위해 스릴러라는, 윤리적 재현 형식으로 맞지 않는 장르를 결합한 것이 아니냐는 말로 사후해석했다. 물론 발화자의 의도와 상관없는 나만의 해석일 수도 있다. 

이를 테면, <살인의 추억>이 스릴러 장르를 활용하는 방식과 영화의 주제의식 사이의 간극 같은 것. <살인의 추억>이 80년대 화성연쇄성폭행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으면서 스릴러적 방식으로 사건을 재현할 때, 여성들이 카메라에 의해 (본인도 모른 채) 보여지고 추적당하는 걸 장르적 쾌감으로 사용했기에 아이러니했던 그 맥락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여자 관객들은 희생자들을 애도하기보다 공포스러운 체험을 한번 더 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 '향숙이', '밥은 먹고 다니냐' 등의 말을 희화화시켜 유행어처럼 내뱉어 댔다. 시대의 아이러니에 대해 논하는 것보다 동물적 반응들이 먼저였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재현방식 자체가 희생자들을 페티시화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격이나 감정이입의 대상이 아니라, 팬티, 브라, 빨간 잠바 등으로 물신화된 철저한 타자일 뿐이었다. 한국영화에서 이러한 스릴러적 방식의 재현의 대척점에 철저하게 '윤리적 재현'을 추구하는 이창동 감독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난 2월, 한 학회지에 <시>의 마지막 장면을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카운터씬으로 해석한 챕터를 넣은 연구논문을 실었다.)

물론 <두 개의 문>은 명백하게 인터뷰를 통해 희생자들의 입장을 전달하고 있고, 김형태,권영국 변호사와 박진, 류주형 활동가의 말이 철거민들의 이야기가 우리가 감정이입할 대상이라고, 우리도 엉겁결에 생존을 위한 요구를 하다 농성 하루만에 생명을 잃은 기가 막힌 사연의 평범한 사람들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기에 타자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뷰를 뺀 모든 화면들을 채우는 것은 애도나 저항보다 폭력의 수행자들이 진압하는 순간에 다가가며 느끼는 긴장감과 파토스이다. 여기서 이 영화가 '차갑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뜨겁다. 음악과 음향마저 우리를 한시도 그냥 놓아주지 않는다. 재연의 대상을 망루를 준비하는 철거민들이 아닌 특공대의 버스 안 장면으로 설정한 것은 국가폭력의 희생양이 철거민들만은 아니라는 주제의식과도 맞닿아 있겠지만(이것은 보이스오버로 경찰들의 증언이 깔리기에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연출된 장면은 흡사 전쟁 영화에서 토벌대가 출동하는 것 같은 '장르적 긴장감'을 배가하고 있다. <박하사탕>에서 영호가 5.18을 진압하러 나가던 장면의 롱샷, 미디엄샷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이다.  

용산참사가 현재진행형이고 재판과정이 말도 안됐으며 국가폭력이 어떻게 국민을 죽이는지 그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영화가 채택한 형식이 재연까지 동원한 폭력의 에스컬레이팅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재연이 들어감으로써 스타일상의 일관성은 극대화되었다. 에스컬레이팅된 폭력에의 기대는 경찰의 채증영상에서 절정을 맞는다. 두 개의 문 중 한 개의 문이 열리고 그곳으로 특공대가 쏟아져 들어갈 때이다. 마구 흔들리고 움직이다 문이 열리는 동시에 멈추고 응시하고 있는 이 장면은 마치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제 올 것이 왔다'는 절정의 감흥을 준다. 

<씬 레드 라인>이나 <맨 온 와이어>에는 어떤 사건, 즉 죽음이나 죽음에 인접한 사건이 나오지만 그걸 스릴러로 풀었을 때 윤리적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가학과 피학이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긴장이 없는 현재상황에서 긴박했던 당시를 구성할 수 있는 자구책으로 재연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산은 애초에 불길이 있었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데 속절없이 망루가 타오르는 걸 모든 사람이 봤다. 그 고통의 순간을 계속 보게 하는 것에 더해 그 고통에 순간에 이르는 고조를 스릴러적으로 강조하는 생생함이 가학적으로 느껴졌다. 국가폭력의 가학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연출자들이 부러 극단으로 밀어붙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윤리적 재현'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패티시즘의 극단이 아닌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한 남자관객이 일행을 향해, 다큐멘터리도 재밌네. 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의 일행이었던 여자관객이 보러오자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잇는 말이 "<트랜스포머> 같은 영화보다 차라리 이런 영화가 더 나은 것 같아." 

분명 <두 개의 문>은 스릴러라는 장르, 극영화적 방식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더욱 친화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 형식을 택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의식과 채택된 형식의 효과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조금 더 논의가 있기를 바란다. 


덧붙임.
홍형숙 감독이 15년 전에 만들었던 메타 다큐멘터리 <변방에서 중심으로>를 보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젊었을 적 모습이 나온다. 김동원 감독은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다큐멘터리가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고 계속 비디오 작업을 할 때, 변영주는 다큐멘터리도 영화라는 걸 알았던 것 같아."  그러니까 <낮은 목소리>를 염두에 두었을 이 말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액티비스트와 필름메이커라는 두 가지 포지션 중 어느 한 곳에 방점을 찍고 작업을 한다는 말이다. 김동원 감독은 여전히 액티비스트에 조금 더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다큐멘터리도 영화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시가 시가 되기 위해서는 시의 형식을 공부해야 하고 영화가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영화적 형식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두 개의 문>의 시도 자체는 평가받아야 하고, 더 나아가 채택한 장르 자체가 영화적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주제의식을 더 빛나게 하는가 아닌가에 의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댓글 5개:

  1. 지젝이 말하는 폭력에 맞서는 폭력으로 이해한다면 스릴러방식의 연출로 관객들이 감독들이 의도를 어긋나지 않게 공감하도록 잘 만들었다는 것에도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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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예, 너무나 의도가 분명하기 때문에 의도 자체를 헷갈릴 만한 위험은 없는 편이죠. 그래서 이렇게 용기있게 밀어붙였을 수도 있고요. 그러나 이 방법론을 접하며 영화를 보고 나서 여전히 찜찜한 느낌을 갖고 계실 분들도 있을 거라 생각하고, 저 또한 그랬기 때문에 그 이유를 설명해보고자 생각을 풀어봤습니다. 그리고 지젝의 '폭력에 대한 폭력'이라 함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폭력)혁명(폭력혁명이라는 건 사실상 동어반복이죠)을 옹호하는 정치적 스탠스를 신학을 통해 설명하려는 건가요?(잠깐 검색) 계급투쟁이나 반제국주의 운동의 영역에서 많이 들어본 수사이고 저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스릴러 장르 차용의 효과나 그 차용이 이 영화의 윤리적 동기와 맺게 되는 관계,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감흥이 '폭력에 맞서는 폭력'으로 의미화되기에는 좀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영화에서 집중하는 폭력의 방향이 한 방향이기도 하고, 여기서 차용한 스릴러라는 장르가 폭력에 맞서는 폭력이 되려면 권력 관계가 역전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장르 자체의 특성이 폭력을 더 증폭시켜 보여줄 수 있기에 선택되었다면 전반적으로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해석은 너무 퉁쳐서 보는 것이라 영화 내에서 장르가 작동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일단 지금보다 더 다양한 반응들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고, 고민도 계속 해보려고 합니다. 답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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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글 잘읽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읽은 리뷰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때 '와 잘만들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딱 이 지점이 찜찜했는데, 생각보다 이 주제에 대한 글은 없더라구요.

    글의 대부분 내용에 동의하면서도, [두 개의 문]에서의 장르적 긴장감이 사건의 페티시즘에서만 머무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입니다. 김소영 평론가가 시네21에서 지적했듯, 칼라TV 박성훈의 마지막 인터뷰 중에서 '망루안 발화의 결정적 장면은 담은 관련 테이프가 있는지 없는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라는 말이 "발본적 부정"으로서 이 영화의 장르적 문법에 대한 해석에서도 중요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지금까지 이 영화가 망루안을 향해서 달려왔지만, 어쩌면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페티시즘의 실제 대상은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고 말하기)

    저 개인적으로는 이 "발본적 부정"이 영화 속에서 좀 더 래디컬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 좀 아쉽기는 하더군요. 다른 예로 문정현 감독의 에서는 영화의 마지막에 갑자기 테잎을 감듯이 영화를 감아버리는데 저는 이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용산]에 대해 제가 쓴 리뷰: http://indienbob.tistory.com/5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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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네, 저도 김소영 교수가 재의미화한 박성훈 활동가의 그 말을 지면에서 다시 읽으면서 눈이 번쩍,, 했죠. 두 개의 문에 대한 리뷰 중에서 김소영 교수가 지적한 그 부분이 가장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작가들(이자 활동가들)이 너무나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기에 표현방식으로 스릴러적 문법을 극대화 했다고 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 자체가 혼동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관객이 받아들이기에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혹은 작가들이 정말로 그걸 의도했을 수도?? '이건 아무 것도 아니야, 화염병이나 특공대의 방패,군홧발을 아무리 전쟁처럼 보여줘도 두 편 다 저 근본적인 국가(자본)폭력의 희생양일 뿐'. 그러나 이 영화의 미학으로 회자되는 것이 장르라면 그 장르(스릴러)의 도입이 이 영화에서 어떤 화학적 효과를 만들어냈는지가 조금 더 논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영화 매체가 관객성을 소구하는 방식이 피학적 상황도 가학적 상황도 '쾌감'으로 전시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외설적인데, 예술영화들이나 다큐멘터리들은 대부분 그 반대방향을 지향하지요. (전시되는 사건이 아주 외설적이더라도 응시를 통한 반복강박으로 윤리를 창조할 수도 있고요.) 그 이유는 윤리적 재현의 의지나 정치적 올바름의 의지 때문이리라 봅니다. 두 개의 문이 한국다큐멘터리에서 아주 다른 영화, 변별되는 영화라는 것은 그 지점을 지적한 이야기일 텐데, '윤리적 동기'로 출발한 이 영화가 재현방식에서는 장르영화의 '외설성'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는 것. 그런데 그 '쾌감'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그게 영화의 (윤리적) 동기와 맞는가? 그 지점에 대한 평론가들의 논의는 없어 보입니다. 전 아닌 것 같거든요. 표현방식과 방향에서. 그 폭력성이 (저항으로서) 망루쪽에서 재연되는 것이었다면 (이건 더 생각해볼 문제에다 심지어 가정이지만) '외설적'이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영화 속 인터뷰와 명확한 작가적 스탠스가 그 문제적 지점을 봉합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어쩌면 관객도 평론가도 본인을 '피학자'의 위치에서 숨막히게 했던 이 영화 속 표현방식이 현실 속의 결과적 '가학자(혹은 공모자)'인 자신들의 죄의식의 크기만큼 와닿았다고 생각하고 좋은 표현방식이라고 인준하거나 찜찜해도 넘겨 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의 관객성은 이미 스크린을 넘어 있기에 텍스트 자체의 장르적 효과에 집중하는 논의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최악의 경우 저만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

    사실 전 '외설적인' 극영화를 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지적하는 건 좀 겸연쩍은데 '외설적인' 것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표현방식이 맞물리는가, 그 부분에 의문을 표하는 것입니다. 원글에서도 그렇고, 댓글에서도 그렇고 더 깊이 들어가서 얘기하면 좋을 텐데 공부도 더 필요하고 생각도 더 필요하고 시간도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문정현 감독의 [용산]은 몇 번 보러 가려다가 놓친 영화인데 리뷰 잘 읽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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